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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및 전설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소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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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2 댓글 0건 조회 8,506회 작성일 18-05-1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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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두천시 上鳳岩洞에 있는 逍遙山(소요산)은 예로부터 자연경승이 빼어나 경기도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사계절 풍광이 아름다워 봄철 철쭉, 여름철 綠陰,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경이 이 산의 자랑이며 달리 小金剛으로 불러왔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의 高僧 元曉대사(617∼686)와 瑤石公主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는데 元曉와 관련이 있는 지명과 사찰이 남아있다. 즉 下白雲臺 아래에는 元曉가 수도했다는 元曉臺, 元曉굴, 自在庵이 있고 瑤石公主와 薛聰(설총)이 머물렀다는 瑤石宮(요석궁)터가 逍遙山 입구 북측에 있다. 설총이 태어난 곳은 아버지 원효의 고향인 慶北 慶山市 仁興里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洗谷洞에서 태어났다고 밝혀지고 있다.

언제 瑤石公主와 薛聰이 북쪽 멀리 逍遙山까지 오게되었는지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원효대사가 수도한 自在庵 가까이 거처를 정하고 母子가 머물렀고 이들이 머문 집이 瑤石宮터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원효대사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한 瑤石公主(太宗武烈王의 둘째 누이)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여자와 관계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며 그때부터 자신을 小性居士라 부르며 전국 名山大川을 주유하고 설법과 수도를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일화가 전해온다. 원효는 원래 화랑의 일원으로 백제전투에 참전하였고 瑤石公主의 첫 남편도 백제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가졌고 인명살상을 죄악시하여인의 길을 버리고 佛門에 귀의하였다. 自在庵의 창건시기가 善德女王 14년 (서기 645년)인 점으로 보아 金春秋가 왕위등극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요산 명소에는 白雲臺(상,중,하), 玉露峰, 觀音峰, 義湘臺, 仙女湯, 元曉폭포, 대암굴, 金宗굴, 원효굴 등이 있으며 조선조 李太祖의 行宮터는 산 입구에 있다.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많이 이 산을 찾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金時習, 徐花潭, 楊士彦 등이다. 최근 동두천시는 廣岩洞(銅店마을) 일대(67만평)를 향토관광마을로 조성하여 꽃길, 산책로, 주말학습장, 주말농장, 물놀이 시설, 삼림욕장, 향토음식점, 숙박시설을 수용하여 수도권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이다.

이곳 自在庵에는 元曉가 머물 때 觀音菩薩을 親見했다는 전설이 있다. 元曉가 庵子에서 혼자 수도할 때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에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 元曉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도승인 元曉는 공연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元曉는 精進을 할 수 없었다. 元曉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몸을 주물러 녹여주었다. 元曉는 묘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마음속으로 念佛을 하면서 유혹을 물리쳤다. 얼마 후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元曉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다. 元曉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벽녘에 元曉는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맑은 물에 몸을 담구어 간밤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佛心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元曉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 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色眼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꾸하였다. 元曉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 元曉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後光을 띈 觀音菩薩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 觀音菩薩이 元曉의 佛心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現身한 것이다. 이 절 이름을 自在庵이라고 고쳐 불렀던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元曉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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