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및 전설 해골물을 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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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2 댓글 0건 조회 8,815회 작성일 18-05-15 00:44본문
원효대사((617-686))는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 지방인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으로 추측)에서 태어났으며, 세속에서의 성은 설(薛)씨였다, 그는 특별히 한 스승을 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널리 배움을 구하였고 한다. 그러던 중에 앞서가는 불교를 배우려고 그 무렵에 문화의 중심지로 불교가 융성하던 당 나라로 떠나기로 하고 일곱살 아래인 의상 대사와 동행하였는데, 고구려 국경을 넘다가 그곳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오르는 구도심을 잠재울 수 없었던 원효 대사는 의상 대사와 함께 다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는데 처음과는 달리 바닷길로 가기로 하고 가다가 어느 날 원효와 의상은 날이 저물어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과 한기를 피하여 무덤 사이에 잠자리를 구하고 잠을 청하였는데 잠을 자던 원효가 몹시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떠보니 캄캄한 밤중이었다. 물을 찾아 주위를 살펴보니 어둠 속에 바가지 같은 것이 있어 다가가 보니 물이 고여 있었다. 물맛을 보니 굉장히 달콤하였다. 스님은 단숨에 그 물을 들이키고 안락한 기분으로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이 마신 바가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무덤 주위에는 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해골만 뒹굴고 있었다. 스님이 바가지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해골이었으며, 달콤했던 물은 그 해골 안에 고여 썩어 있던 빗물이었다. 스님은 갑자기 뱃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도 물맛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는데,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그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밤사이에 원효의 곁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의상은 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고 있는 원효에게 물었다.
"아니 스님. 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당 나라에 유학 길을 떠난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
"그야 물론 도를 구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도를 구했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지요."
원효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그 길로 신라로 되돌아와, 무덤에서 깨달은 법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님의 높은 덕은 신라 땅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으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한 대학자 설총이었다. 대사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가지고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말에서 무애를 따다가 무애무(無碍舞)라는 춤을 추고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며 다녔다. 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뜻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행함으로서 귀족사회와 상류층에서만 신앙되던 신라의 불교를 널리 대중화시켜 누구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6>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이 마신 바가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무덤 주위에는 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해골만 뒹굴고 있었다. 스님이 바가지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해골이었으며, 달콤했던 물은 그 해골 안에 고여 썩어 있던 빗물이었다. 스님은 갑자기 뱃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도 물맛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는데,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그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밤사이에 원효의 곁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의상은 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고 있는 원효에게 물었다.
"아니 스님. 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당 나라에 유학 길을 떠난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
"그야 물론 도를 구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도를 구했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지요."
원효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그 길로 신라로 되돌아와, 무덤에서 깨달은 법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님의 높은 덕은 신라 땅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으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한 대학자 설총이었다. 대사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가지고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말에서 무애를 따다가 무애무(無碍舞)라는 춤을 추고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며 다녔다. 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뜻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행함으로서 귀족사회와 상류층에서만 신앙되던 신라의 불교를 널리 대중화시켜 누구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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